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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 뒤로 조성 중인 ‘천왕대불’이 보인다. 한때 흑요석을 캤던 채석장에 현재는 불두만 부조돼 있지만 완성되면 높이 100m가 넘는 대불이 될 것이다. 남향의 이 불상은 정면으로 의중마을과 마주하며 멀리 천왕봉을 바라본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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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 뒤로 조성 중인 ‘천왕대불’이 보인다. 한때 흑요석을 캤던 채석장에 현재는 불두만 부조돼 있지만 완성되면 높이 100m가 넘는 대불이 될 것이다. 남향의 이 불상은 정면으로 의중마을과 마주하며 멀리 천왕봉을 바라본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5일이동평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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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 그리고 정착
지리산둘레길 제4구간은 금계마을에서 의탄교를 건너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의평마을과 의중마을을 거친다. 이 세 마을은 행정구역상 의탄리다. 의탄리의 ‘탄’은 ‘여울 탄(灘)’ 자이다. 여울이란 물이 얕고 빠르며 돌이 많아 배가 다니기 위험한 곳을 일컫는 말로서 이곳의 지형을 적우진 주식
절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원래의 표기는 ‘숫 탄(炭)’ 자였다. 예전에 숯을 굽는 곳이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의 한자 표기가 ‘여울 탄’으로 바뀐 것이다. 이곳의 옛 이름은 의탄소(義炭所)였다. 소(所)란 신라에서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하층 특수행정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향·부곡과 마찬가지로 소는 천민이 살던 곳으로, 죄지은 신천기릴게임
자·전쟁 포로자·반역죄인의 유족 등을 따로 정한 곳에 모여 살게 하면서, 나라에서 소용되는 종이나 철·숯 따위를 만들어 나라에 바치게 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마천에는 마천소와 의탄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천소는 종이를 만드는 지소, 의탄소는 숯을 굽는 탄소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조선조에 행정구획 정리로 소가 사라지게 되었으나 마천은 여전히 힘없는 하층 천민들이 모여들어 사는 곳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랜 전란으로 급격히 늘어난 유랑민들이 이곳까지 밀려들어 왔다. 죄지은 자, 망한 자, 쫓겨난 자들이 고단한 유랑 길을 접으면서 정착했던 곳이 이곳 마천이었다. 변강쇠와 옹녀의 유랑 끝도 이곳 마천이었다.

유랑민으로 이곳에 정착한 원조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추성마을은 구형왕이 이곳에 들어와 추성(楸城)이라는 성을 쌓고 군마를 훈련하며 피난처로 이용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며,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다. 성안마을은 성의 안쪽에 있다고 하여, 그리고 성안마을 위쪽 계곡인 국(國)골은 가락국의 왕이 피난 생활을 했다고 하여 각각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칠선계곡 방향에 위치한 두지(뒤주)터는 왕이 그곳에 창고를 짓고 군량미를 비축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 마천은 고달픈 유랑민들을 기꺼이 품어주는 정착지였다.








의중마을 용유담 산길.





의중마을 용유담 산길.



◇검정의 또 다른 의미
둘레길의 의중마을은 벽송사 길과 용유담 길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있다. 지금은 계곡을 따라 도로가 나 있어 의중마을을 거치지 않고 추성이나 벽송사로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이 마을을 거쳐 산 쪽으로 난 숲길이 유일한 통로였는데, 둘레길 때문에 이 길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상내봉 능선 끝자락에 걸터앉은 의중마을에는 옻나무가 지천이다. 몇 년 전에는 옻순 축제를 개최한 바 있을 정도로 옻나무가 유명하다. ‘마천 옻’ 하면 이곳이 원산지라 생각하면 된다. 이곳 주민들은 초봄에 옻순 따는 것부터 시작해서 5월이면 옻나무 껍질을, 7~8월엔 생칠을, 겨울에는 화칠을 채취하는 등 일년 내내 옻나무와 함께한다. 생칠이란 살아있는 옻나무의 껍질에 V자형으로 상처를 내어 그 자국에서 흘러나온 옻 진액을 말하며, 화칠은 옻나무 줄기를 잘라 외피에 일정 간격으로 홈을 둘러 파내어 불 위에 돌려가며 구우면 파인 홈으로 보글보글 끓으면서 흘러나오는 옻 진액을 말한다. 생칠이나 화칠이 근래 들어서 약용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지만, 예로부터 칠기의 천연도료로 사용됐다. 나전칠기에서 나전이 돋보이는 것은 옻칠의 바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오히려 어떤 색감으로도 덮을 수 없는 칠흑의 진중함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도 하다.
마을의 맞은편 마천석재에서 채석됐던 오석의 빛깔 역시 옻칠한 것 같은 흑요(黑曜)의 색이다. 지금은 채석하고 있지 않지만, 한때는 마천의 옻만큼 마천석 또한 유명했다. 현재 마천석재의 채석장에서는 거대한 석불을 조성하고 있는데, 불두만 부조된 상태이다. 이른바 ‘천왕대불’이다. 완성되면 불상의 높이 108m, 좌대 30m에 어깨너비 40m의 규모로 세계 최대의 불상이 될 것이라 한다. 남향의 이 불상은 정면으로 의중마을과 마주하면서 멀리 천왕봉을 바라본다. 이 대불이 완성되면 오석의 석벽은 광배의 상서로운 색으로 진중함을 더할 것이며, 천왕봉을 위시한 지리연봉에 서상(瑞相)의 불광(佛光)을 채울 것이라 상상해 본다.

아무튼 나는 둘레길 의중마을에서 검정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내가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검정이 부정적 느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엄숙과 절제, 권위와 신뢰의 진중함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이곳은 숯을 구웠던 의탄소가 아닌가. 숯 역시 검은색이다. 과거의 숯, 현재의 옻,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의 마천석 천왕대불이 검정의 진중함으로 이어갈 것이다.








벽송사 미인송과 도인송.





벽송사 미인송과 도인송.



◇벽송사 도인송·미인송
벽송사는 6·25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면서 국군의 방화로 소실됐다. 그 후 1960년대 들어 구한원응의 원력으로 중건됐다. 그런 연유로 내면의 역사적 무게와는 달리 외면적으로는 정갈하다는 감상 외에 고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3층 석탑과 목장승 그리고 도인송(道人松)·미인송(美人松)을 일견하면 외피적으로도 벽송사가 그리 녹록하지 않은 내공의 가람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벽송사의 명물, 도인송과 미인송은 푸른 소나무라는 벽송(碧松)의 의미와 묘하게 연결된다. 벽송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람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도인송과 미인송은 당우의 제일 뒤쪽 언덕바지에 서 있다. 도인송은 원통전 뒤쪽의 비탈길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올려보는 도인송의 자태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당당한 기세이다. 언덕바지의 뒤쪽은 3층 석탑이 있는 널찍한 평지이다. 원래의 절터가 그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어 아래쪽으로 이동해 새로 지은 것이 현재의 당우다. 3층 석탑 앞에는 미인송이 휘우듬한 모습으로 서 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옆에서 보면 늘씬하게 휘어진 자태가 고혹적인 여인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미인송인가 보다.








벽송사.





벽송사.




이곳에서는 미인송과 도인송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미인송의 늘씬함과 도인송의 당당함이 어울리면서 한 폭의 잘 짜인 그림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인송을 향해 기울어 있는 미인송의 모습에서 애절한 구애의 스토리텔링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도인송과 미인송의 줄기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특히 미인송의 상처는 줄기의 상단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이 모두 일제강점기 때 송탄유를 추출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만든 상처다. 역사적 아픔이다. 또한 6·25 때 국군의 방화로 절이 불타면서 이들은 이 자리에 그대로 화마에 사라질 뻔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한 아픔을 침묵으로 차곡차곡 쌓아둔 내공이 오늘날 미인송·도인송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것이리라.








황부호 작가





황부호 작가



글·사진= 황부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