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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영국은 산업혁명의 열풍으로 들끓고 있었다. 증기기관의 제임스 와트(1736-1819), 방직기계의 리처드 아크라이트(1732-1792) 같은 발명가들이 영웅 대접을 받던 시대였으니, 화학에 빠진 젊은이의 꿈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윌리엄의 가족은 퀘이커교도였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 제조업 원가계산 회를 위해 써야 한다"는 믿음이 뼈에 박힌 사람들이었다.



▲윌리엄 앨런 ⓒ필자 제공



쟁기 마당에서 꽃핀 과학적 열정

1792년, 22세의 윌리엄은 퀘이커교도 운영기관별 인 요제프 베반이 운영하던 '쟁기 마당 약방'(Plough Court Pharmacy)에 합류했다. 지금으로 치면 스타트업 제약회사에 들어간 셈이다. 당시 약방이라는 곳은 단순히 약을 파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치료제를 연구 개발하는 일종의 바이오텍 기업 역할을 했다. 좋은 약방이라면 윤리적 기준과 제품의 질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쟁기 마당 약방이 바로 그런 debt 곳이었다.
윌리엄은 여기서 진짜 실력을 발휘했다. 화학실험에 대한 타고난 재능과 꼼꼼한 성격이 만나면서, 약품의 순도를 높이고 새로운 화합물을 만드는 데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특히 그는 '순수함'에 집착했는데, 이는 퀘이커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이기도 했다. "불순물이 섞인 약을 팔아서 환자를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이 소득증빙이란 그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이 약방 사장님, 본업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틈틈이 논문을 쓰고 실험결과를 학회에 발표했다. 1807년 탄소연구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가이 병원에서 화학강의도 했다. 험프리 데이비(1778-1829)의 요청으로 왕립연구소에서도 강연을 했을 정도니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자였던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네이처 자동대출납입제도 에 논문 내고 하버드대에서 강연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운명적 만남, 토머스 클락슨과의 우정
하지만 윌리엄의 진짜 무대는 실험실이 아니라 사회현장이었다. 1794년, 운명적인 만남이 일어났다. 토머스 클락슨(1760-1846)과 만나 노예무역 반대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클락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노예제의 참상을 알게 되어 평생을 노예제 폐지에 바친 인물이었다. 그는 나중에 윌리엄을 가리켜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좀 과장인 것 같기도 하지만, 친구 사이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영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클락슨의 열정과 윌리엄의 과학적 접근법, 그리고 퀘이커교 네트워크의 조직력이 만나면서 노예제 반대운동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했다. 윌리엄은 단순히 구호만 외치지 않았다. 노예선의 구조를 분석하고, 노예무역의 경제적 데이터를 수집하며, 과학적 근거로 무장해서 논리정연하게 반박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머리로 납득시키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퀘이커교도의 실천력, 그 무서운 위력
윌리엄이 속한 퀘이커교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종파였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을 거부하며, 무엇보다 말만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교회 안에서만 경건하게 굴다가 밖에 나가면 딴사람이 되는 일요일 신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윌리엄도 예외는 아니어서 노예제 폐지, 교육개혁, 감옥 제도 개선, 정신질환자 처우 개선 등 온갖 사회문제에 발을 담갔다. 이 양반, 정말 바쁘게 살았다. 낮에는 약방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각종 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주말에는 교도소나 정신병원을 방문해서 실태를 조사했다. 지금 같으면 과로사 했을 것이다.
영국외국학교협회(British and Foreign School Society)의 위원이자 재무담당으로 1808년부터 죽을 때까지 활동했는데, 이 단체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교육이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으니, 이런 활동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가난하다고 무식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냐"는 것이 윌리엄의 지론이었다.
감옥 개혁의 선구자
윌리엄의 또 다른 업적은 감옥 제도 개혁이다. 엘리자베스 프라이(1780-1845)와 함께 런던의 뉴게이트 감옥을 비롯한 영국 전역의 감옥을 돌아다니며 실태를 조사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당시 영국의 감옥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남녀노소가 한데 섞여 있고, 위생상태는 최악이고, 간수들은 뇌물을 받고 죄수들을 괴롭혔다.
윌리엄은 여기서도 과학적 접근법을 발휘했다. 감옥별 사망률을 통계로 내고, 질병발생 유형을 분석하고, 재범률과 교육수준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죄수도 사람이다. 처벌은 하되 인간다운 대우는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지금 보면 당연한 소리지만, 200년 전에는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19세기 영국사회를 뒤흔든 조용한 혁명
윌리엄의 진짜 위력은 그가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프랑스 대혁명(1789-1799)처럼 단두대를 세우거나 바리케이드를 쌓은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와 인도주의적 가치로 무장해 영국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들을 하나씩 공략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약방 사장으로 시작해서 과학자가 되고, 다시 사회운동가가 된 그의 이력은 당시 신흥 중산층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귀족이 아니어도, 성직자가 아니어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이다. 이는 기존의 신분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일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영국을 넘어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1816년부터 1840년까지 여러 차례 유럽 대륙을 순회하며 감옥개혁과 교육제도개선을 위한 국제회의를 주도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1777-1825),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1770-1840) 같은 군주들도 그의 의견을 경청했다. 일개 약방 사장이 황제와 국왕을 만나 조언을 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윌리엄의 독특함은 과학적 합리성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조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데이터와 통계를 중시했지만,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실험실에서 화학반응을 관찰하듯 사회현상을 분석했지만, 차가운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따뜻한 실천가가 되었다.
이런 태도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이었다.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에만 관심을 가져야 하고, 사회문제는 정치가나 성직자의 몫이라는 분업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엄은 "과학자라고 해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식은 상아탑 안에 갇혀 있을 때가 아니라 현실에 적용될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적 의미, 전문가의 사회적 역할
윌리엄 앨런의 삶을 보면서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오늘날의 과학자들, 전문가들, 지식인들이 그만큼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을까? 그는 전문성을 사회변화의 도구로 활용했다. 화학 지식으로 좋은 약을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지위와 영향력을 활용해 노예제 폐지와 교육평등을 위해 싸웠다.
물론 그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현대사회는 훨씬 복잡하고, 전문분야도 세분화되어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상아탑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요즘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백신을 개발하고, 방역지침을 만들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모두 과학자들의 몫이었다. 윌리엄 앨런이 200년 전에 보여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작은 약방에서 시작된 큰 변화
결국 윌리엄 앨런의 이야기는 한 개인이 어떻게 시대를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희망적인 사례다. 그는 금수저 출신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혁명가를 꿈꾼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속한 퀘이커 공동체의 가치를 실천하고,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삶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구호나 화려한 행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꾸준한 실천이라는 것이다. 작은 약방에서 정직한 약을 만들던 청년이 결국 19세기 영국사회를 더 인간적인 곳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작지 않은 울림을 준다.
혹시 당신도 동네약방 사장인가? 그렇다면 당신 안에도 윌리엄 앨런이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일이다.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