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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자]
2014년 4월 1일 밤 10시쯤이었다. 늦은 밤 집에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민청련 동지 김설이였다.
"언니, 지금 문숙이 딸 은희 전 개인회생절차개시결정 화 받았는데 문숙이가 위독하대. 암이 전신에 퍼져 그동안 입원해 있었나 봐. 독한 년이 아이들 입단속 시켜 아무도 모르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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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 발병 이전, 건강하던 때의 박문숙
ⓒ 민청련동지회
아무도 몰랐던 박문숙의 암 투병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나은행 대출상담 불과 넉 달 전인 작년 2013년 12월 6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문숙이 남편 김병곤 23주기 때 봤을 때도 팔을 조금 다쳤다고 어깨띠를 한 것 빼고 얼굴은 괜찮아 보였는데.
비상연락망이 가동됐다. 다음날 아침 박문숙이 입원해 있는 강남세브란스 병원으로 민청련 여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인실에 뼈만 남은 몸뚱이에 머리를 박박 밀고 둘째 딸 대학생 소액대출 은희 가슴에 비스듬히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문숙은 이미 의식이 없었다. 은희가 아니었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뻔한 모습으로.
삽시간에 강남성모병원 안팎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사람들은 얼이 빠졌다.
남편 김병곤의 후배 박석운이 진두지휘를 해 함세웅 신부님을 모시고 '박 자료제공 문숙을 위한 기도회'를 공지했다. 문숙이와 유난히 가까웠던 윤수산나 수녀도 달려왔다. 병원에서 마침 아는 원목수녀를 만났다. 문숙이는 세례명까지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 병원에 상주하는 원목수녀님이 기도를 해주느라고 문숙이 병실에 자주 갔는데 입원한 한 달 동안 딸 둘만 곁에 있고 어쩌면 그렇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는지, 굉장히 외로운 사람인 줄 알았단다.
수녀님이 문숙이의 마지막 한 달을 전해주셨다. 입원할 때부터 전신에 암이 퍼져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극심한 통증이 말도 못 했다고 한다. 그 잔인한 시간, 첫딸 희진은 직장 때문에 병실을 못 지켰고 둘째 은희가 엄마를 돌봤다.
4월 2일 저녁 6시 문숙이가 눈을 감았다. 기도회에 달려온 사람이 졸지에 문상객이 됐다.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온 민청련 여자들은 인재근(남편 김근태. 아래 남편 이름), 이기연(연성수), 최정순(이을호), 김설이(이범영), 조명자(김희택), 이경은(서원기), 이미영(박우섭), 황인숙(권형택)이었다.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을 기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만난 인연들이다. 민청련 상근활동가의 아내들이었지만 민청련 주요 간부들이 모두 구속, 수배되고 사무실이 폐쇄됐을 때 남편들을 대신해 사무실을 탈환했고,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당한 고문을 전세계에 폭로하고 고문정권과 맞서 싸운, 아내이기 전에 민청련 여자들이라고 불린 투사들이다.
1990년 12월 먼저 세상을 뜬 남편 김병곤 곁으로 박문숙은 갔다. 김병곤 묘는 마석 모란공원 가파른 꼭대기 응달진 곳이어서, 매년 기일 때면 눈이 오거나 땅이 얼어붙어 후딱하면 미끌어지고 엎어지고 난리를 치며 올라가야 했다. 박문숙의 묘는 양지 바른 아래쪽에 마련됐고, 유족과 동지들은 박문숙의 뜻을 받들어 김병곤의 묘를 박문숙의 묘로 이전해 합장했다. 박문숙이 해마다 어지간히 속상해했는데, 이십여 년 묵은 한을 기어코 죽어서 해결한 것이다. 누가 열부 아니랄까 봐.
▲ 박문숙이 별세하자 마석 모란공원에 먼저 간 김병곤의 묘와 합장되었다.
ⓒ ⓒ민청련동지회
김병곤과의 운명적인 만남
박문숙은 1955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영주 시내에서 약품 도매업을 하는 아버지의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란 문숙은 자존심도 셌고 자기주장도 강했다. 1974년, 영주여고를 졸업한 박문숙은 서울여대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좁은 지방생활을 벗어나 드넓은 수도 서울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틀에 박힌 모범생을 벗어난 문숙의 시야도 넓어졌다. 자연스럽게 서울여대와 서울법대 농법회가 연합한 동아리 '녹수회'에 가입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70년대,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발맞춘 학생운동 써클이었다. 방학 때마다 서울대 농법회와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갔었는데 그때 농법회 회장은 서울법대 이범영이었다.
"아이고 이범영과 나랑 동갑인데 회장이라고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나보다 엄청 선배처럼 보였다니까. 한번은 하루 종일 밭일하느라 애썼다고 아짐들이 옥수수, 감자를 쪄주셔서 먹었는데 얼마나 혼을 내던지. 농촌봉사활동 와서 동네 어른들에게 민폐 끼쳤다고."
4학년이 되자 박문숙은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깊은 고민 끝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론 냈는데 우연찮게 길이 바뀌는 사태가 발생했다. 후배가 향린교회 야학교사가 급히 필요하다고 야학교사 요청을 하는데 공부를 더 할 생각이라고 야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김병곤을 만났다. 향린야학 교장 김병곤과 야학교사 박문숙. 비록 두 살 위 선배였지만 박문숙한테 김병곤은 지도자이자 큰 어른이었다. 1974년 민청학련 주모자로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당당하게 "영광입니다" 일갈을 한 사람. 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광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같이 했던 이영희 선생이 투사를 넘어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은 사람.
박문숙은 원래 처음 보는 이에게 차갑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김병곤은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김병곤은 78년 4월, 야학 교장과 교사로 함께 활동했던 짧은 인연을 뒤로 하고 동일방직 똥물사건 유인물을 배포한 죄목으로 구속됐다. 문숙이 고향 영주에 잠시 내려간 사이 일어난 일이어서 문숙은 나중에야 김병곤이 구속된 것을 알았다. 문숙은 김병곤에겐 조금 특별한 감정을 가졌었지만 김병곤의 향린교회 후배 하나가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말에 마음을 정리했다.
이후 문숙은 야학을 정리하고 성수동에 있는 봉제공장 여공으로 취직했다. 시다에서 미싱공으로 도약을 할 80년 초, 문숙은 위장취업자라는 게 들통나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세상은 박정희가 피살당하고,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을 장악하는 등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이때 박문숙은 여성농민운동을 지도하던 이우재 선생의 소개로 충남 예산 오가중학교 영어 교사로 취업했다. 하고 싶던 공부도 무산됐고, 노동운동 시도도 무참히 좌절됐고. 어지러운 세상에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김병곤을 다시 만난 것은 안양교도소 면회실, 80년 7월이었다. 동일방직 유인물 사건으로 구속, 1년 10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 선배가 운영하는 중소기업에 회사원으로 입사를 했었다. 그러나 80년 서울의봄 시위 배후로 몰려 안양교도소에 다시 수감된 것이다.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던 문숙이 김병곤 가족과 연락이 돼 면회까지 하게 된 짧디 짧은 그 시간. 만날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만나게 된다던가. 10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두 사람을 평생의 인연으로 묶은 운명의 시간이 됐다.
▲ 1981년 3월, 박문숙과 김병곤의 결혼식 장면
ⓒ 민청련동지회
가장 행복했던 단칸방 살이 4년
다행히 김병곤의 수감생활은 짧았다. 몇 달 감옥생활을 하고 석방돼 구속 전에 입사했던 회사에 복직했다.
김병곤과 결혼을 약속한 문숙은 예산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81년 3월, 마침내 김병곤과 박문숙은 서울대 상대 은사이신 변형윤 교수를 모시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남영동에 신혼방을 얻고 82년엔 맏딸 희진을, 84년엔 둘째 딸 은희를 얻었다. 김병곤은 회사원으로 문숙은 두 아이의 엄마로, 두 사람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4년. 그 평화가 그토록 짧으리라고는 두 사람은 물론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는데.
83년 어느 가을날, 남영동 셋방에 김근태 선배가 찾아왔다. 연탄불로 따뜻해진 단칸방 한구석엔 기저귀가 널려있고, 아랫목 이불 속엔 둘째 은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광경에 김근태는 가슴이 뻐근했다고 한다. 창립 준비를 하고 있는 공개 청년운동단체에 김병곤과 함께 하자고, 보나마나 한 가시밭길을 권하러 찾아온 참이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를 들으며 문숙은 어땠을까. 청년운동단체 투신이 그렇게 흔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남편의 결정을 존중했던 문숙은 조용조용 자신이 감당해야 할 생활 방편을 물색했다.
1983년 9월 30일 민청련이 창립되고 조직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김병곤은 일단 회사를 다니면서 비공개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청년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다.
민청련 조직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회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 시내 곳곳에 있는 고층건물에 올라가 플래카드를 펼치고 선전물을 뿌렸다. 기습적인 가두시위가 장소를 바꿔가며 거의 매일 열렸고 덩달아 민청련 아내들도 분주해졌다.
생업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는 남편 옆에서 문숙은 아이들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서울 망원동에 농민과 소비자 직거래 장터를 열어 무농약 쌀과 곡물을 취급했다. 그리고 인재근, 김설이, 조명자, 이기연, 최정순 등 민청련 활동가의 아내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판매하는 쌀 포대를 들고 김희택의 망원동 집을 찾기도 하고, 이범영이 청계천 고가도로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서로 잡혀가자 아내 김설이를 찾아가 함께 할 정도로 민청련 가족들과 가깝게 지냈다.
민청련 여자들, 탄압의 방패막이로 나서다
85년 5월 서울대를 비롯한 5개 대학 73명이 미문화원 점거농성사태가 터졌다. 광주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한 미국은 사과하고 군부독재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는 요구를 걸고 말이다. 곧 학생운동권과 민주운동단체를 향한 독재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이 몰아쳤다.
탄압정국에 대항하기 위해 민청련은 긴급하게 학생운동권과 연대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민청련 대표로 김병곤과 이범영이,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대표로 황인하가 나서 논의를 이끌었다.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체포. 85년 7월 18일 김병곤과 황인하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문숙은 아이들은 큰시누에게 맡기고 변호사 선임하랴, 경찰서 쫒아가 면회요구 투쟁하랴, 정신이 없었다. 용산경찰서 면회실에서 마침내 남편 김병곤을 마주했다. 고문은 안 당했냐? 몸은 어떠냐? 남편의 안위부터 확인하는데 이상하게도 남편이 발이 불편했는지 자꾸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했다. 그러다 눈치챘다. 문숙이 재빨리 운동화 끈을 매는 척 엎드렸더니 과연, 남편 신발 바닥에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다음 타깃은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이다. 빨리 대비하라."
예상했던 대로 민청련 탄압이 몰아쳤다. 85년 9월 4일, 김근태 의장은 유언비어 혐의로 구류 10일을 살고 풀려나는 마지막 날 새벽,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김근태가 끌려가기 직전 9월 2일엔 일단 도피했다가 아버지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집에 잠시 들른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안기부로 연행됐다. 이어서 민청련 집행부가 초토화됐다. 남아있던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거나 수배됐다.
급박했다. 9월 5일 가족들과 회원들이 서울 중국 삼각동의 민청련 사무실에서 구속된 김병곤, 불법 연행된 김근태와 이을호를 즉각 석방하라는 구호를 걸고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자 9월 8일, 수사기관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출입문에 X자 각목을 치고 대못을 박았다.
▲ 1985년 10월 15일, 서울 중국 삼각동의 민청련 사무실에서 민청련 탄압에 대한 항의농성. 왼쪽부터 문익환 계훈제 임채정 박문숙 인재근.
ⓒ 민청련동지회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문숙은 커봤자 3살짜리 희진이, 돌 지난 지 몇 달 안 된 둘째 은희 이것들을 맡길 데가 없으면 업고, 끌면서 면회를 다니고 항의농성에 합세했다. 때로는 구속자들이 끌려간 수사기관을 찾아 석방하라고 항의하다가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에 내팽개쳐지기도 했다.
어찌 문숙이뿐일까. 수배령이 떨어진 이범영의 아내 김설이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형사들이 집에 쳐들어와 젖병 빠는 아이와 배가 남산만 한 산모를 앞에 두고 한 대 칠듯한 살벌한 어조로 이범영 어디 숨었냐고 협박을 해대고 세간살이를 뒤집어놨다. 오죽하면 두 돌도 안 된 건혜가 형사만 보면 눈을 부릅뜨고 입을 삐죽댔을까.
둘째가 만삭인 이을호의 아내 최정순은 안기부에서 당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된 남편 이을호를 석방시키기 위해 수사기관, 종교단체를 울며불며 찾아다녔다. 다른 집들도 다 고만고만해 한두 살짜리 기저귀 차고 젖 먹는 아이들을 누구한테 맡기냐가 매일매일 고민이었다. 문숙이도 예전 조그맣게 운영하던 망원동 쌀집을 처분한 뒤 민청련 가족들의 대열에 합세했다.
85년 12월 12일, 민청련 여자들의 주도로 학생, 노동, 농민 등 각 부문 운동의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조직했다. 민가협 초대 총무는 인재근이 맡았고 문숙은 재정부장을 맡았다. 경찰서로, 교도소로, 농성장으로 매일 매일이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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