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키넷: 해외 성인 컨텐츠 제공 사이트와 국내 법적 이슈 무료야동
페이지 정보
작성일 25-09-21 20:12본문
밍키넷: 새로운 온라인 커뮤니티의 매력과 활용법
밍키넷이란 무엇인가?
밍키넷의 주요 기능과 특징
밍키넷을 활용하는 방법
밍키넷의 장단점 분석
밍키넷의 미래 전망
밍키넷이란 무엇인가?
밍키넷의 주요 기능과 특징
밍키넷은 다음과 같은 주요 기능과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명성 보장: 사용자들은 익명으로 활동할 수 있어, 부담 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의 게시판: IT, 게임, 생활, 취미 등 다양한 주제의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실시간 채팅: 실시간으로 다른 사용자들과 채팅을 할 수 있는 기능도 제공됩니다.
밍키넷을 활용하는 방법
밍키넷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추천합니다:
관심 있는 주제의 게시판 찾기: 자신의 관심사에 맞는 게시판을 찾아 활동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참여: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규칙 준수: 밍키넷의 규칙을 준수하며, 다른 사용자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밍키넷의 장단점 분석
장점: 익명성 보장, 다양한 주제의 게시판, 실시간 채팅 기능 등이 있습니다.
단점: 익명성으로 인한 부작용, 일부 게시판의 관리 미흡 등이 있습니다.
밍키넷의 미래 전망
키워드: 밍키넷, 온라인 커뮤니티, 익명성, 게시판, 실시간 채팅, 밍키넷 주소찾기, 31
[조명자]
그 해 9월, 초가을 햇살은 찐득한 열기를 뿜으며 사정 없이 팔뚝을 휘어감았다. 마석 모란공원, 혜숙이 잠들 직사각형 묘터는 이미 반듯하게 파여 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갓 오십. 남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바라기가, 엄마 손길이 한없이 필요한 아픈 맏딸아이, 입시준비생인 두 아들. 명문대 욕심이 누구보다 많은 욕심쟁이 엄마 혜숙이 새끼들 못 잊어 눈이나 제대로 감았을까. 2004년, 민청련 최민화 부의장의 아내 박혜숙은 그렇게 떠났다. 친자매처럼 정을 나누던 민청련 여자들 중 1번 타자로.
신협인터넷뱅킹
▲ 경기여고 졸업식 때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맺어 투리스모 진 인연
박혜숙은 강원도 삼척 태생이다. 서울로 올라와 수송초등학교, 경기여중고를 나와 1972년 이화여대 약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밖에 모르던 범생이 박혜숙이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이대 동아리 '파워' 회장을 맡고부터였다. 격랑의 70년대.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선포가 이어졌 10등급대출은행 다. 영구집권을 꿈꾸는 박정희 독재정권은 농민이든, 노동자든, 학생이든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철저하게 압살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잇달아 선포됐다. 반독재투쟁전선 열기로 전국 대학가가 들끓었다. 이대 운동권 박혜숙도 그 중심에 있었다. 전국 주요 대학을 아우른 반유신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2금융권신용대출자격 결성이 무르익던 3월 말에서 4월 초,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기밀을 탐지한 중앙정보부한테 조직은 박살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고 반국가단체 민청학련 연루자로 이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중앙정보부 지하실, 서빙고 보안사대공분실로 연행돼 무차별 고문으로 뭉개졌다.
민청학련 이대 책 박혜숙도 남산 중정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대에서 고용유지 연행자로는 혜숙이 유일했다. 여차했다간 뼈도 못 추릴 공포의 지하 조사실, 고문 도구 앞에 혜숙은 무너졌다. 배후를 대라는 저승사자 앞에 얼굴도 못 본 최민화를 찍었다. 최민화는 KSCF(전국기독학생총연맹)의 서울 연합회장. 정 버틸 수 없을 땐 신원이 공개된 단체 대표를 배후로 '부는' 게 운동권의 매뉴얼이었다.
연대 최민화도 중정 지하 조사실로 끌려갔다. 가자마자 통닭구이, 물고문을 자행하더니 이대 배후가 최민화라는 걸 박혜숙이 실토했으니 뺄 생각 말고 이실직고하라고 물속에 머리통을 처박았다.
이대 박혜숙이라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절대 아니라고 부인을 했으나 돌아오는 건 더 가혹한 고문뿐이었다. 최민화가 아무리 고문을 해도 아니라고 부인하자 박혜숙을 끌고 와 대질심문을 하겠다고 했다. 여기에서 최민화는 무너졌다. 눈앞에서 여학생이 당하는 꼴을 보는 건 차마 못 할 짓이었다. 두말없이 자기가 배후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혜숙은 100일 만에 풀려났다. 이대 김옥길 총장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된 동생 김동길 교수와 이대에서 유일하게 연행된 제자 박혜숙의 석방을 위해 매일 아침 중앙정보부 입구에서 일인시위를 한 덕분이었다.
▲ 신혼 초 박혜숙 최민화 부부
ⓒ 민청련동지회
최민화를 향한 일편단심
얼굴도 못 본 최민화를 배후로 불었으니. 최민화가 얼마나 당했을까는 안 봐도 비디오다. 혜숙은 그때부터 최민화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오산 보건소 간호사였던 최민화 어머니는 학생운동을 하는 아들을 탐탁해하지 않아 면회도 오지 않으셨으니, 혼자 아들 뒷바라지를 하시는 아버지에겐 구세주가 따로 없었을 게다.
함흥 초대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난 최민화 어머니는 캐나다 선교사가 원산에 세운 영생여고보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함남 도립병원 간호학과을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월남했다. 어머니는 일제 시대에 오빠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진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독립운동이건 민주화운동이건 가는 길은 말로가 뻔하다. 막지는 못할지언정 뒷바라지는 언감생심이었다.
혜숙은 수업이 끝나면 하루도 빼지 않고 교도소로 달려갔다. 책과 영치물을 차입한 뒤 변호사 만나랴 인권단체, 종교단체 쫒아다니랴 재판정 나가랴 쉴 틈이 없었다. 그뿐인가. 최민화 부모님 계신 오산을 오르내리며 소식을 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신적인 옥바라지는 대학가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들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졸업도 안 한 재학생이 결혼한 부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니. 중앙정보부가 맺어준 평생 인연 박혜숙과 최민화. 이때부터 혜숙에게는 최민화가 인생의 전부였다.
최민화를 마음에 둔 혜숙은 복학을 했으나 학생운동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최민화와의 미래를 생각해 봤을 때 감옥이 일상인 반독재투쟁은 둘이 다 할 수 없다. 열심히 돈 벌어 민화 형 뒷바라지에만 충실하겠다 결심하고 최민화에게 접근했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한 번은 연대 앞 다방에서 약속을 했는데 최민화가 그 약속을 깜빡 잊었고, 다른 약속이 있던 오후 4시에 그 장소로 갔다. 그런데 세상에, 그때까지 기다리던 혜숙이가 입구에 들어서는 최민화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바빴어? 형. 왜 인제서 와?"
오지 않는 연인을 6시간씩이나 기다린 여자. 최민화는 이런 여자 앞에 자신의 갈등이 얼마나 몰염치하고 미안하든지.
박혜숙의 고군분투
1975년 2월, 박정희 정권은 세계 여론이 따가웠던지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형집행정지로 풀어줬다. 최민화도 포함됐다. 하지만 불과 1년여 만인 1976년 5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서울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연행됐고, 그대로 구속됐다.
혜숙의 고군분투가 다시 시작됐다. 약학대학 3학년 복학생에게 주어진 학습량은 엄청났지만 혜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오산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 통학을 했다. 어머니 곁에 딱 붙어 힘이 돼 드리고 또다시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인권단체, 종교단체, 사회운동단체에 협조를 구하고, 약혼녀로 등록을 한 뒤 매일 면회 다니고.
1년 2개월 실형을 선고받은 최민화의 옥바라지는 혜숙에겐 껌값이었다. 이런 각오 없이 덥석 반독재투쟁가를 선택했겠는가. 그러나 만기 출소 즈음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중정에서 요구하는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앞서 받았던 민청학련 사건 12년 징역 형집행정지 처분을 취소하겠다는 것이었다.
최민화에 앞서 전향서를 거부한 장영달이 형집행정지 취소로 만기출소를 못 하고 7년을 더 살아야 하게 됐다는데 최민화도 장영달과 똑같은 처지 아닌가. 혜숙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면회실 창살 앞에서 혜숙이 눈물을 쏟았다.
"영달이 형이 못 나왔어. 형집행정지가 취소됐데. 영달이 형이 7년이면 당신은 12년인데."
최민화 자신이 이름을 불어 민청학련 구속자가 된 장영달. 똑같이 출소한 뒤 김지하 양심선언문을 뿌리라고 권해 그걸로 긴급조치 9호로 다시 구속된 친구 장영달. 그 장영달이 전향서를 거부하고 장기수가 됐는데 어떻게 전향서를 쓴단 말인가. 완강하게 전향서를 거부하는 최민화를 보고 혜숙이 계속 흐느꼈다.
"이제 나에겐 내 인생이 없어졌어. 이제부터 자기가 석방될 때까지 당신 옥바라지하면서 돈만 벌 거야. 당신이 집안 걱정 안 할 만큼 12년 동안 돈 벌어 당신 석방된 뒤 여행 다니면서 남은 인생 맘껏 즐길 거야."
돌직구 박혜숙이다. 전향서를 거부하면서 면회도 오지 말고 네 인생 찾으라고 일갈한 최민화였지만 혜숙이 포기하겠는가. 민청학련 공범이자 제가 다니던 제일교회 당회장 박형규 목사와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을 찾아가 울며불며 매달렸다.
"최민화는 저와 결혼할 사이예요. 그런데 각서 안 쓰면 형집행정지가 취소돼 12년을 살게 된대요. 제가 어떻게 12년을 기다려요. 제발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특별면회를 온 혜숙이 두 어른의 말씀을 전했다. 재판도 없이 12년 감옥살이 할 바에야 그까짓 각서 써주고 나와 일하고 다시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밖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찮은 각서 때문에 묶여있는 건 전술적으로 너무 무모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두 분 다 극력 만류하셨다고.
만기 보름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 다시 찾아왔다. 안국동 어른과 박 목사님이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 다시 한번 가달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마침내 최민화가 펜을 들었다.
"본인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며 이에 각서를 제출합니다."
나가서 더 열심히 싸우다가 꼭 다시 오겠다. 장영달이 감옥에 있는 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1977년 5월 30일. 1년 2개월 형기를 마친 최민화가 석방됐다. 석방 며칠 후가 어머니 회갑이었다. 최민화와 혜숙은 부모님을 모시고 에버랜드 소풍을 하는 것으로 회갑연을 대신했다.
▲ 1978년 6월 10일 박혜숙 최민화 결혼식, 주례는 연세대 신학대학의 스승 김찬국 교수가 맡았다.
ⓒ 민청련동지회
운동권의 사랑방, 세민약국
출소한 최민화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았고 혜숙은 졸업을 했다. 혜숙은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혜숙의 집안 특히 엄마의 반대가 완강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대학도 잘린 징역쟁이에 직업도 변변찮은 사윗감을 받아들일 엄마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더구나 딸은 명문대 출신 약사인데.
이번에도 돌직구 혜숙의 똥고집이 시작됐다. 인사를 드리러 온 예비 사윗감을 이불 뒤집어쓰고 돌아보지도 않는 엄마를 보고 최민화는 허락하실 때까지 결혼을 유보하자고 혜숙을 달랬으나 막무가내였다. 혼자서 예식장을 구하러 다니더니 종로 태화관으로 예약까지 했다. 남의 자식 탓할 것 있나. 당신 딸이 더 미쳐 날뛰는데. 청첩장까지 찍어 돌리는 것을 본 엄마가 드디어 손을 드셨다.
1978년 6월 10일, 양가 부모님과 재야 어르신, 선후배 동지들 앞에 민청학련 공범자 김찬국 교수님을 주례로 모시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과 동시에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 마포구 대흥동으로 이사를 했다. 판자촌이라 해도 할 말 없는 허름한 동네에 혜숙이 '세민약국' 간판을 달고 약국을 개업했다. 최민화는 독재정권 감시망을 요리조리 피하며 <씨알의 소리>에 시대의 목소리를 담느라 동분서주했고 혜숙은 약국을 개업해 정신없이 바빴지만, 첫아이를 임신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고 혜숙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신혼을 이어갔다.
대흥동 집과 약국 골방은 그야말로 운동권 사랑방이 돼 상설 회의장소이자, 통금에 걸리면 뛰어들어와 하루 유숙하는 숙박업소 구실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감옥에서 나와 끼니 걱정을 하는 동지들에게 몰래바이트를 소개하는 직업소개소 역할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민약국 아니 '세민살롱' 마담 혜숙은 모든 게 재밌기만 했다. 위로는 함석헌 선생님,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님 등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고 아래로는 운동권 선후배 친구들의 신망을 받는 남편이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 세민약국을 운영하던 때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79년 2월, 혜숙은 집에서 첫딸을 낳았다. 조산원을 운영하셨던 어머님이 집에서 첫 손주를 직접 받아주셨고 이후 두 손자 모두 어머님이 받아주셨다.
하지만 국내 정치 상황은 어지럽기만 했다.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자는 넘쳐났다. 노동현장도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8월 9일,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YH여공 172명이 마포 신민당사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YH노동자들에게 우리가 지켜주겠다면서 경찰당국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신민당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11일 새벽, 2천여 진압병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조 대의원 김경숙이 추락사했다. 10월,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켰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10월 16일 부산을 필두로 김영삼 제명 철회, 유신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시작됐고 곧이어 마산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유신독재정권에 정면으로 저항한 부마항쟁은 박정희 목숨줄을 끊는 계기가 됐다.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의 총알이 박정희의 가슴을 뚫었다.
전두환에게 빼앗긴 남편
예쁜 딸아이는 하루하루 재롱이 늘어 갔지만 밖은 스산하고 어두웠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새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되지 못한 저항세력은 우왕좌왕했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됐고 공포가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최민화는 긴장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견딘 세월보다 더 혹독한 탄압과 시련이 신혼의 단꿈에 젖은 가정을 덮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공개투쟁단체인 민청협(민주청년인권협의회)이 움직였다. 하루빨리 유신헌법을 철폐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계엄 상태여서 집회가 불가했기 때문에, 명동에 있는 YWCA에서 위장결혼식을 열고 그 자리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마침내 10월24일, YWCA 위장결혼식장에서 취지문이 낭독되자마자 각오했듯 계엄군들이 난입했다. 의자 내던지는 소리, 비명 소리 아비규환이 연출됐다. 함석헌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과 최민화를 포함한 청년학생들 140여 명이 끌려갔다.
최민화는 육군본부 범죄수사대로 끌려가 1차로 몽둥이 세례를 받고,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필동 수도경비사령부 비상군법회의 감찰부 조사를 마치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다.
혜숙의 옥바라지가 다시 시작됐다. 첫딸 고은이는 돌도 안 지났고 둘째가 배 속에 있을 때였다. 그 몸으로 약국을 운영하면서 하루도 빼지 않고 계엄사령부로, 재판부로, 교도소로 쓸고 다녔다. 계엄사에 연행돼 있을 때 아버님 칠순이 됐지만 생신 잔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박혜숙의 화양연화 시대
열부 박혜숙을 누가 말리랴. 하루는 매일 면회를 오던 아내가 오지 않았다. 만삭인데 오다가 쓰러진 건 아닌가? 아이를 낳은 건가? 최민화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접견이 왔다길래 나갔더니 혜숙이 밝게 웃고 있었다.
"어제 많이 기다렸지? 어제도 오려고 그랬는데 어머니가 하도 말리셔서 못 왔어. 그저께 자기 면회하고 약국에 있는데 진통이 오는 거야. 그래서 약국 문 닫고 집에 올라가 8시에 아들을 낳았어. 당신 닮아 하얗고 잘 생긴."
옥중에 있는 남편한테 둘째 아들 출산을 전하는 혜숙은 행복하기만 했다. 산전 수전 공중전이 어디 한두 번이랴. 까짓것 징역 1년인데. 서울의 봄을 틈타 복학이 허용됐다는 말에 남편 대신 남산만한 배로 복학 절차를 밟아 옥중 최민화를 연대 3학년 복학생으로 만들었던 왕극성 박혜숙인데.
남편은 감옥에 있었지만 세상은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12.12반란으로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잡고 5.18 광주학살을 자행했다. 5.18 예비검속을 신호탄으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터졌다. 내란음모를 했다는 혐의로 김대중과 가깝다는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송건호 선생, 이해찬 조성우 등 24명의 인사들이 체포됐다.
서슬 퍼런 계엄령 치하에서는 감옥이 오히려 안전지대였다. 남편이 만기출소 할 연말까지 혜숙은 약국 일과 면회 빼고는 큰일이 없어 오히려 신간은 훨씬 편해졌다. 수배된 남편 후배들이 약국을 찾아오면 차비라도 쥐어 줄 수 있는 형편이 얼마나 다행인가. 약국이라 항상 현금이 있는 혜숙은 씀씀이도 넉넉한 여자였다.
1980년 11월 29일, 마침내 남편 최민화가 만기 출소했다. 그리고 이듬 해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출판 책임자로 취업을 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는 외국 기독교 단체들의 지원을 받는 만큼 월급과 상여금도 적지 않았다.
혜숙은 약국 운영, 남편은 안정된 직장. 살림도 피고 어머님과 아이들 모두 평화롭던 그 몇 년은 혜숙 부부의 화양연화 시대였다.
▲ 1985년 7월, 남편과 시어머니 첫째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막내를 배에 품은 채 갔던 설악산 여행
ⓒ 민청련동지회
그 해 9월, 초가을 햇살은 찐득한 열기를 뿜으며 사정 없이 팔뚝을 휘어감았다. 마석 모란공원, 혜숙이 잠들 직사각형 묘터는 이미 반듯하게 파여 고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갓 오십. 남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남편바라기가, 엄마 손길이 한없이 필요한 아픈 맏딸아이, 입시준비생인 두 아들. 명문대 욕심이 누구보다 많은 욕심쟁이 엄마 혜숙이 새끼들 못 잊어 눈이나 제대로 감았을까. 2004년, 민청련 최민화 부의장의 아내 박혜숙은 그렇게 떠났다. 친자매처럼 정을 나누던 민청련 여자들 중 1번 타자로.
신협인터넷뱅킹
▲ 경기여고 졸업식 때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맺어 투리스모 진 인연
박혜숙은 강원도 삼척 태생이다. 서울로 올라와 수송초등학교, 경기여중고를 나와 1972년 이화여대 약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밖에 모르던 범생이 박혜숙이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이대 동아리 '파워' 회장을 맡고부터였다. 격랑의 70년대. 김대중 납치사건, 인혁당 사건,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선포가 이어졌 10등급대출은행 다. 영구집권을 꿈꾸는 박정희 독재정권은 농민이든, 노동자든, 학생이든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철저하게 압살했다.
1974년 1월, 긴급조치가 잇달아 선포됐다. 반독재투쟁전선 열기로 전국 대학가가 들끓었다. 이대 운동권 박혜숙도 그 중심에 있었다. 전국 주요 대학을 아우른 반유신투쟁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2금융권신용대출자격 결성이 무르익던 3월 말에서 4월 초,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기밀을 탐지한 중앙정보부한테 조직은 박살나기 시작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고 반국가단체 민청학련 연루자로 이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중앙정보부 지하실, 서빙고 보안사대공분실로 연행돼 무차별 고문으로 뭉개졌다.
민청학련 이대 책 박혜숙도 남산 중정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대에서 고용유지 연행자로는 혜숙이 유일했다. 여차했다간 뼈도 못 추릴 공포의 지하 조사실, 고문 도구 앞에 혜숙은 무너졌다. 배후를 대라는 저승사자 앞에 얼굴도 못 본 최민화를 찍었다. 최민화는 KSCF(전국기독학생총연맹)의 서울 연합회장. 정 버틸 수 없을 땐 신원이 공개된 단체 대표를 배후로 '부는' 게 운동권의 매뉴얼이었다.
연대 최민화도 중정 지하 조사실로 끌려갔다. 가자마자 통닭구이, 물고문을 자행하더니 이대 배후가 최민화라는 걸 박혜숙이 실토했으니 뺄 생각 말고 이실직고하라고 물속에 머리통을 처박았다.
이대 박혜숙이라니, 모르는 사람이었다. 절대 아니라고 부인을 했으나 돌아오는 건 더 가혹한 고문뿐이었다. 최민화가 아무리 고문을 해도 아니라고 부인하자 박혜숙을 끌고 와 대질심문을 하겠다고 했다. 여기에서 최민화는 무너졌다. 눈앞에서 여학생이 당하는 꼴을 보는 건 차마 못 할 짓이었다. 두말없이 자기가 배후라고 자백했다. 그리고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혜숙은 100일 만에 풀려났다. 이대 김옥길 총장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된 동생 김동길 교수와 이대에서 유일하게 연행된 제자 박혜숙의 석방을 위해 매일 아침 중앙정보부 입구에서 일인시위를 한 덕분이었다.
▲ 신혼 초 박혜숙 최민화 부부
ⓒ 민청련동지회
최민화를 향한 일편단심
얼굴도 못 본 최민화를 배후로 불었으니. 최민화가 얼마나 당했을까는 안 봐도 비디오다. 혜숙은 그때부터 최민화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오산 보건소 간호사였던 최민화 어머니는 학생운동을 하는 아들을 탐탁해하지 않아 면회도 오지 않으셨으니, 혼자 아들 뒷바라지를 하시는 아버지에겐 구세주가 따로 없었을 게다.
함흥 초대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난 최민화 어머니는 캐나다 선교사가 원산에 세운 영생여고보를 나온 신여성이었다. 함남 도립병원 간호학과을 졸업하고 원산도립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다 월남했다. 어머니는 일제 시대에 오빠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진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본 것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독립운동이건 민주화운동이건 가는 길은 말로가 뻔하다. 막지는 못할지언정 뒷바라지는 언감생심이었다.
혜숙은 수업이 끝나면 하루도 빼지 않고 교도소로 달려갔다. 책과 영치물을 차입한 뒤 변호사 만나랴 인권단체, 종교단체 쫒아다니랴 재판정 나가랴 쉴 틈이 없었다. 그뿐인가. 최민화 부모님 계신 오산을 오르내리며 소식을 전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신적인 옥바라지는 대학가는 물론 시민사회단체들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졸업도 안 한 재학생이 결혼한 부부는 저리 가라 할 정도니. 중앙정보부가 맺어준 평생 인연 박혜숙과 최민화. 이때부터 혜숙에게는 최민화가 인생의 전부였다.
최민화를 마음에 둔 혜숙은 복학을 했으나 학생운동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최민화와의 미래를 생각해 봤을 때 감옥이 일상인 반독재투쟁은 둘이 다 할 수 없다. 열심히 돈 벌어 민화 형 뒷바라지에만 충실하겠다 결심하고 최민화에게 접근했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한 번은 연대 앞 다방에서 약속을 했는데 최민화가 그 약속을 깜빡 잊었고, 다른 약속이 있던 오후 4시에 그 장소로 갔다. 그런데 세상에, 그때까지 기다리던 혜숙이가 입구에 들어서는 최민화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바빴어? 형. 왜 인제서 와?"
오지 않는 연인을 6시간씩이나 기다린 여자. 최민화는 이런 여자 앞에 자신의 갈등이 얼마나 몰염치하고 미안하든지.
박혜숙의 고군분투
1975년 2월, 박정희 정권은 세계 여론이 따가웠던지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형집행정지로 풀어줬다. 최민화도 포함됐다. 하지만 불과 1년여 만인 1976년 5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서울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연행됐고, 그대로 구속됐다.
혜숙의 고군분투가 다시 시작됐다. 약학대학 3학년 복학생에게 주어진 학습량은 엄청났지만 혜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오산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 통학을 했다. 어머니 곁에 딱 붙어 힘이 돼 드리고 또다시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인권단체, 종교단체, 사회운동단체에 협조를 구하고, 약혼녀로 등록을 한 뒤 매일 면회 다니고.
1년 2개월 실형을 선고받은 최민화의 옥바라지는 혜숙에겐 껌값이었다. 이런 각오 없이 덥석 반독재투쟁가를 선택했겠는가. 그러나 만기 출소 즈음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중정에서 요구하는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앞서 받았던 민청학련 사건 12년 징역 형집행정지 처분을 취소하겠다는 것이었다.
최민화에 앞서 전향서를 거부한 장영달이 형집행정지 취소로 만기출소를 못 하고 7년을 더 살아야 하게 됐다는데 최민화도 장영달과 똑같은 처지 아닌가. 혜숙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면회실 창살 앞에서 혜숙이 눈물을 쏟았다.
"영달이 형이 못 나왔어. 형집행정지가 취소됐데. 영달이 형이 7년이면 당신은 12년인데."
최민화 자신이 이름을 불어 민청학련 구속자가 된 장영달. 똑같이 출소한 뒤 김지하 양심선언문을 뿌리라고 권해 그걸로 긴급조치 9호로 다시 구속된 친구 장영달. 그 장영달이 전향서를 거부하고 장기수가 됐는데 어떻게 전향서를 쓴단 말인가. 완강하게 전향서를 거부하는 최민화를 보고 혜숙이 계속 흐느꼈다.
"이제 나에겐 내 인생이 없어졌어. 이제부터 자기가 석방될 때까지 당신 옥바라지하면서 돈만 벌 거야. 당신이 집안 걱정 안 할 만큼 12년 동안 돈 벌어 당신 석방된 뒤 여행 다니면서 남은 인생 맘껏 즐길 거야."
돌직구 박혜숙이다. 전향서를 거부하면서 면회도 오지 말고 네 인생 찾으라고 일갈한 최민화였지만 혜숙이 포기하겠는가. 민청학련 공범이자 제가 다니던 제일교회 당회장 박형규 목사와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을 찾아가 울며불며 매달렸다.
"최민화는 저와 결혼할 사이예요. 그런데 각서 안 쓰면 형집행정지가 취소돼 12년을 살게 된대요. 제가 어떻게 12년을 기다려요. 제발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특별면회를 온 혜숙이 두 어른의 말씀을 전했다. 재판도 없이 12년 감옥살이 할 바에야 그까짓 각서 써주고 나와 일하고 다시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밖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찮은 각서 때문에 묶여있는 건 전술적으로 너무 무모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두 분 다 극력 만류하셨다고.
만기 보름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 다시 찾아왔다. 안국동 어른과 박 목사님이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 다시 한번 가달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마침내 최민화가 펜을 들었다.
"본인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며 이에 각서를 제출합니다."
나가서 더 열심히 싸우다가 꼭 다시 오겠다. 장영달이 감옥에 있는 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1977년 5월 30일. 1년 2개월 형기를 마친 최민화가 석방됐다. 석방 며칠 후가 어머니 회갑이었다. 최민화와 혜숙은 부모님을 모시고 에버랜드 소풍을 하는 것으로 회갑연을 대신했다.
▲ 1978년 6월 10일 박혜숙 최민화 결혼식, 주례는 연세대 신학대학의 스승 김찬국 교수가 맡았다.
ⓒ 민청련동지회
운동권의 사랑방, 세민약국
출소한 최민화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았고 혜숙은 졸업을 했다. 혜숙은 결혼을 서둘렀다. 그러나 혜숙의 집안 특히 엄마의 반대가 완강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대학도 잘린 징역쟁이에 직업도 변변찮은 사윗감을 받아들일 엄마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더구나 딸은 명문대 출신 약사인데.
이번에도 돌직구 혜숙의 똥고집이 시작됐다. 인사를 드리러 온 예비 사윗감을 이불 뒤집어쓰고 돌아보지도 않는 엄마를 보고 최민화는 허락하실 때까지 결혼을 유보하자고 혜숙을 달랬으나 막무가내였다. 혼자서 예식장을 구하러 다니더니 종로 태화관으로 예약까지 했다. 남의 자식 탓할 것 있나. 당신 딸이 더 미쳐 날뛰는데. 청첩장까지 찍어 돌리는 것을 본 엄마가 드디어 손을 드셨다.
1978년 6월 10일, 양가 부모님과 재야 어르신, 선후배 동지들 앞에 민청학련 공범자 김찬국 교수님을 주례로 모시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과 동시에 경기도 오산에서 서울 마포구 대흥동으로 이사를 했다. 판자촌이라 해도 할 말 없는 허름한 동네에 혜숙이 '세민약국' 간판을 달고 약국을 개업했다. 최민화는 독재정권 감시망을 요리조리 피하며 <씨알의 소리>에 시대의 목소리를 담느라 동분서주했고 혜숙은 약국을 개업해 정신없이 바빴지만, 첫아이를 임신했고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고 혜숙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신혼을 이어갔다.
대흥동 집과 약국 골방은 그야말로 운동권 사랑방이 돼 상설 회의장소이자, 통금에 걸리면 뛰어들어와 하루 유숙하는 숙박업소 구실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감옥에서 나와 끼니 걱정을 하는 동지들에게 몰래바이트를 소개하는 직업소개소 역할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민약국 아니 '세민살롱' 마담 혜숙은 모든 게 재밌기만 했다. 위로는 함석헌 선생님,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님 등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고 아래로는 운동권 선후배 친구들의 신망을 받는 남편이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 세민약국을 운영하던 때의 박혜숙
ⓒ 민청련동지회
79년 2월, 혜숙은 집에서 첫딸을 낳았다. 조산원을 운영하셨던 어머님이 집에서 첫 손주를 직접 받아주셨고 이후 두 손자 모두 어머님이 받아주셨다.
하지만 국내 정치 상황은 어지럽기만 했다. 유신반대 시위로 구속자는 넘쳐났다. 노동현장도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8월 9일,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YH여공 172명이 마포 신민당사에서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YH노동자들에게 우리가 지켜주겠다면서 경찰당국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신민당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11일 새벽, 2천여 진압병력을 투입해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조 대의원 김경숙이 추락사했다. 10월,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켰다.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10월 16일 부산을 필두로 김영삼 제명 철회, 유신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시작됐고 곧이어 마산으로 불이 옮겨붙었다.
유신독재정권에 정면으로 저항한 부마항쟁은 박정희 목숨줄을 끊는 계기가 됐다.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의 총알이 박정희의 가슴을 뚫었다.
전두환에게 빼앗긴 남편
예쁜 딸아이는 하루하루 재롱이 늘어 갔지만 밖은 스산하고 어두웠다. 박정희가 죽었다고 새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되지 못한 저항세력은 우왕좌왕했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됐고 공포가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최민화는 긴장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견딘 세월보다 더 혹독한 탄압과 시련이 신혼의 단꿈에 젖은 가정을 덮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공개투쟁단체인 민청협(민주청년인권협의회)이 움직였다. 하루빨리 유신헌법을 철폐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계엄 상태여서 집회가 불가했기 때문에, 명동에 있는 YWCA에서 위장결혼식을 열고 그 자리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마침내 10월24일, YWCA 위장결혼식장에서 취지문이 낭독되자마자 각오했듯 계엄군들이 난입했다. 의자 내던지는 소리, 비명 소리 아비규환이 연출됐다. 함석헌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과 최민화를 포함한 청년학생들 140여 명이 끌려갔다.
최민화는 육군본부 범죄수사대로 끌려가 1차로 몽둥이 세례를 받고,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필동 수도경비사령부 비상군법회의 감찰부 조사를 마치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다.
혜숙의 옥바라지가 다시 시작됐다. 첫딸 고은이는 돌도 안 지났고 둘째가 배 속에 있을 때였다. 그 몸으로 약국을 운영하면서 하루도 빼지 않고 계엄사령부로, 재판부로, 교도소로 쓸고 다녔다. 계엄사에 연행돼 있을 때 아버님 칠순이 됐지만 생신 잔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박혜숙의 화양연화 시대
열부 박혜숙을 누가 말리랴. 하루는 매일 면회를 오던 아내가 오지 않았다. 만삭인데 오다가 쓰러진 건 아닌가? 아이를 낳은 건가? 최민화의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접견이 왔다길래 나갔더니 혜숙이 밝게 웃고 있었다.
"어제 많이 기다렸지? 어제도 오려고 그랬는데 어머니가 하도 말리셔서 못 왔어. 그저께 자기 면회하고 약국에 있는데 진통이 오는 거야. 그래서 약국 문 닫고 집에 올라가 8시에 아들을 낳았어. 당신 닮아 하얗고 잘 생긴."
옥중에 있는 남편한테 둘째 아들 출산을 전하는 혜숙은 행복하기만 했다. 산전 수전 공중전이 어디 한두 번이랴. 까짓것 징역 1년인데. 서울의 봄을 틈타 복학이 허용됐다는 말에 남편 대신 남산만한 배로 복학 절차를 밟아 옥중 최민화를 연대 3학년 복학생으로 만들었던 왕극성 박혜숙인데.
남편은 감옥에 있었지만 세상은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12.12반란으로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잡고 5.18 광주학살을 자행했다. 5.18 예비검속을 신호탄으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 터졌다. 내란음모를 했다는 혐의로 김대중과 가깝다는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송건호 선생, 이해찬 조성우 등 24명의 인사들이 체포됐다.
서슬 퍼런 계엄령 치하에서는 감옥이 오히려 안전지대였다. 남편이 만기출소 할 연말까지 혜숙은 약국 일과 면회 빼고는 큰일이 없어 오히려 신간은 훨씬 편해졌다. 수배된 남편 후배들이 약국을 찾아오면 차비라도 쥐어 줄 수 있는 형편이 얼마나 다행인가. 약국이라 항상 현금이 있는 혜숙은 씀씀이도 넉넉한 여자였다.
1980년 11월 29일, 마침내 남편 최민화가 만기 출소했다. 그리고 이듬 해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출판 책임자로 취업을 했다.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는 외국 기독교 단체들의 지원을 받는 만큼 월급과 상여금도 적지 않았다.
혜숙은 약국 운영, 남편은 안정된 직장. 살림도 피고 어머님과 아이들 모두 평화롭던 그 몇 년은 혜숙 부부의 화양연화 시대였다.
▲ 1985년 7월, 남편과 시어머니 첫째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막내를 배에 품은 채 갔던 설악산 여행
ⓒ 민청련동지회
관련링크
- http://90.kissjav.blog 1회 연결
- http://19.kissjav.life 1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