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 주체들이 의회 구성원이 되어 법 개정 논의를 벌인 ‘사물의 의회’가 지난 1~2일 서울시 서울시청 서소문청사에서 진행됐다. 조직위 제공


“이제 정치적 질문은 ‘너는 누구냐’에서 ‘네가 무엇에 의존하느냐’로 바뀌어야 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는 2020년 ‘스피노자상’ 수상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대기, 동물, 기술, 식물, 해양 등 비인간 존재들도 정치적 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 hings) 개념을 제시했던 그가, 만년에 이르러선 “비인간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핵심이라 얘기한 것이다.
라투르가 제시한 “탈인간중심적 민주주의 모델”인 ‘사물의 의회’ 본회의가 지난 1~2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열렸다. 인간(농민·노동자·기업·미래세대·기업인)뿐 아니라 대기·해양·산림·동물·기술 등 비인간도 대변하는 100여명(10개 그룹)이 열띤 토론 끝에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10대 요구안’을 내놓은 것이다. 여기엔 라투르가 생애 하반기 강조했던 ‘상호 의존성’을 바탕으로 삼은 듯한 ‘불편을 감수할 의무’도 포함됐다.
“인간종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존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의무를 진다.” 이 제안은 ‘의원 투표’에서 8번째로 많은 지지(3.6%)를 받아 10대 요구안에 포함됐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해, 얼마만큼, 어떤 불편을 감수하라는 것일까. ‘동물 그룹’ 참가자로 이를 처음 제안한 김바다씨는 책을 쓰기 위해 ‘캣맘’(길고양이 돌보미)들을 인터뷰하다가 이런 문제 의식을 갖게 됐다고 했다. “늘 나오는 이야기가 동네 사람들이 ‘고양이가 있어서 불편하다’고 항의한다는 것이었어요. 차량 위에 발자국이 찍힌다든가 갑자기 나타나 놀란다든가 그런 이유죠. 그러면서 캣맘들에게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민원 넣어서 적극적으로 고양이를 쫓아내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김씨는 이것이 고양이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거라 봤다. 그“‘네가 불편하니 사라져줘야겠어’란 태도가 동물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점차 정치·경제·행정적으로 우리 사회에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타자와 거리를 두는) ‘비침습적’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고 해도, 우린 결국 서로에게 피해·가해를 하게 됩니다. 라투르가 말한 ‘상호 의존’ 개념에는 이러한 우리 존재의 양면성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단지 ‘내가 지금 불편하다’에서 그칠 게 아니라, 그것이 언젠가 우리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순환적 사고가 필요한 거죠.” 이 때문에 그는 “동물들이 제 자리에 있을 때 우리가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물의 의회’ 100명의 대변인(의원)들은 각 그룹의 요구안을 도출한 뒤 전체 그룹 토론을 통해 10대 요구안을 선정했다. 사진은 동물 그룹 5대 요구안. 조직위 제공


‘불편을 감수할 의무’가 모든 이의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동물 그룹 내에서도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란 평가를 받았고, 다른 그룹과의 회의 중에는 ‘왜 모두가 불편해야 하냐’는 볼멘소리를 들었다. 대상과 범위를 구체화할 수는 없느냐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애초 김씨는 이 안을 환경정책기본법 제6조(‘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신설 조항으로 포함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토론 과정에서 ‘법 개정보다는 더 상위의 개념으로 제시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동물 그룹에 참여했던 코난(활동명) 살처분폐지연대 활동가는 “기후변화와 동물 문제에서는 사회 구성원의 시대 감수성, 인류의 인식과 서사 등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간들이 동물을 물건으로 보지 않고 생명으로 본다면 정책과 법안의 변화가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그가 제안해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10대 요구안에는 포함되지 못한 중 하나가 ‘동물배상기금’ 제안이었다. 축산업, 동물전시업 등으로 인간에게 착취·이용당한 동물들을 위한 기금을 국가총생산(GDP) 규모에 비례해 할당하자는 아이디어다. 이 안은 미래세대 그룹에서 유사한 제안이 나오면서 ‘기후·생태 위기 기금’으로 병합됐다. 그러나 ‘인간은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침해했을 인정’하라는 내용과 기금 사용처를 명시한 부분은 끝내 담기지 못했다. 김바다씨는 “인간의 잘못을 인정하는 내용은 전체 요구안 가운데 오직 이 요구안에만 담겼는데 살리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사물의의회조직위원회 내부에서도 ‘불편을 감수할 의무’가 10대 요구안에 포함된 것은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란 반응이 나왔다. 김환석 조직위원장(국민대 명예교수)은 “비인간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 기후위기가 주는 반성”이라면서 “지구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 의존해야 하는데, 인간이 그중 동물과의 공존을 그동안 가장 뼈저리게 느꼈기에 나올 수 있는 제안 같다”고 평가했다.



인간과 ‘비인간’ 주체들이 의회 구성원이 되어 법 개정 논의를 벌인 ‘사물의 의회’가 지난 1~2일 서울시 서울시청 서소문청사에서 진행됐다. 조직위 제공


10대 요구안에는 이밖에도 기후생태헌법 제정, 기후시민의회 구성, 기후정의기금 설치 등 여러 신선한 제안들이 담겼다. 10개를 꼽기 위한 최종 투표에는 36개 요구안이 올랐는데, 모두 고른 지지를 받았다. 김 위원장은 “1위(기후생태헌법 제정) 지지율이 7.3%였는데, 2·3위도 6~7%의 지지를 얻었다”면서 “뽑히지 않은 26개 제안도 다 소중한데 굳이 투표해야 하냐는 의견도 나왔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각 그룹 ‘대변인’들은 막판까지 “무엇을 미는 것이 더 좋을지 고민”하고, ‘외교관’과 ‘기록자’들은 치열하게 다른 그룹과 협상을 벌였다. 김추령 조직위원(성공회대 연구교수)은 이런 과정 자체가 ‘사물의 의회’다웠다고 평가했다. “처음엔 (각 그룹) 요구안이 뾰족하고 모나기도 했지만, 숙의 과정을 거치고 요구안들이 둥글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의 전선을 만들고 기후위기에 대응해나가는 과정이 이처럼 서로에게 물들고 스며드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직 정해진 바가 없지만, 이번에 국내 처음 열린 ‘사물의 의회’ 실험이 과연 내년에도 진행될지 관심이다. ‘대변인’들은 벌써부터 “내년에는 요구안에 대한 세칙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한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